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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개의 파주이야기<8> 제남 천불산과 표돌천 공원

입력 : 2018-06-28 17:27:00
수정 : 0000-00-00 00:00:00

묵개의 파주이야기<8>

제남 천불산과 표돌천 공원

산동에서 본 파주와 교하 <2>

 

 

  청명절은 중국의 명절입니다. 3일 간의 긴 연휴가 시작되는 바람에 가는 곳 마다 길이 많이 막혔습니다. 처음 예정은 케이블카를 타고 산에 오르기로 했는데, 길이 막히는 바람에 늦어서 마지막 편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어쩔 수 없이 걸어서 올라야 했습니다. 그 덕분에 좋은 일도 있었지요. 연도 곳곳에 새겨놓은 석각을 구경하는 재미도 쏠쏠했습니다. 태산에서 맞이하는 두 가지 행운이 있다는데 하나는 일출과 또하나는 ‘태산우(泰山雨)’라는 비입니다. 

  두 가지를 함께 맞이하면 좋았겠지만, 한식을 기념하는 것처럼 비가 내려 아쉽게도 일출은 볼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구름이 펼치는 신비로운 장면은 볼 수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보며 저는 시 한 수를 지었습니다. 

 

 동해육룡영한식(東海六龍迎寒食), 선등로산망대악(先登嶗山望岱岳).

 동해의 여섯 용이 한식을 맞아, 노산에 먼저 올라 태산을 바라보았지.

 잠유곡부대부자(暫游曲阜對夫子), 미승백운이산계(未乘白雲履山階)

 잠시 곡부에서 공자를 만났다가, 흰 구름을 타지 못해 걸어서 올랐다네.

 멱멱묵적하처개(覓覓黙跡何處介), 일몰산로행인귀(日沒山路行人貴).

 두리번거리며 옛사람의 흔적을 찾는데, 해 넘어간 산길엔 인적도 드물었네.

 산상우정숙귀향(山上友情孰歸鄕), 중도수록대기파(中道秀鹿待期坡).

 먼저 오른 벗들은 고향마저 잊었고, 중도에는 아름다운 사슴이 언덕에서 기다리네.

 소회미로탄지성(少會迷路彈指聲), 오룡수심미진시(五龍愁心未盡時).

 오라버니 길 잃을까 누이는 손뼉을 치고, 다섯 용의 걱정은 끝나지 않았네.

 야심심처무사도(夜深尋處無事到), 금야필하급시우(今夜必下及時雨).

 깊은 밤 무사히 거처를 찾았으니, 오늘 밤에 반드시 태산우가 내리리.

 

  여섯 친구를 보며, 동해 용왕의 명에 따라 태산우를 내리려고 태산에 오른 것으로 비유한 시입니다. 공자를 만나느라고 늦었지만 태산우가 내렸으니 태산 여행의 임무는 완수한 셈입니다. 

  이 시에는 이산(履山), 묵개(默介), 우향(友鄕), 녹파(鹿坡), 소탄(少彈), 급우(及雨) 등 여섯 벗들의 호가 등장합니다. 운율을 무시하고 내키는 대로 치기만 드러낸 것 같습니다. 그래도 태산우와 함께 좋은 추억으로 남을 시가 되었습니다. 

  태산에서 내려와 산동성의 성도이자 샘물의 도시 제남으로 갔습니다. 아침 일찍 황하를 보고 대명호와 표돌천 공원을 찾기로 했습니다만, 연휴를 맞아 차가 너무 밀리는 바람에 대명호는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표돌천 공원에는 제가 좋아하는 이청조의 기념관이 있습니다. 저는 봄이 되면 늘 ‘총류교화(寵柳嬌花), 녹비홍수(綠肥紅瘦)’라는 휘호를 씁니다. 원래는 다른 작품에 나오는 구절인데 유명한 여추우(余秋雨)가 최고의 절창이라고 칭송한 것을 제가 붙여보니 초봄에서 초여름까지의 변화하는 자연을 절묘하게 느낄 수 있어 제가 좋아하는 싯구입니다. 

  아시다시피 봄소식은 버들이 가장 먼저 알립니다. 버들을 보고 좋아하는 순간 아름다운 꽃들이 피어나 아양을 떱니다. 그것이 총류교화입니다. 봄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어느새 녹음이 짙어오면 붉은 꽃들이 사라집니다. 초봄부터 여름까지 자연의 변화를 여덟 글자를 절묘하게 표현했습니다. 조각가인 소탄은 옥을 깎아서 만든 이청조의 상을 보고 넋이 나간 것 같았습니다. 

  대명호를 가지 못한 아쉬움을 달래려고 제남의 남산에 해당하는 천불산을 찾았습니다. 중국인들이 성군으로 여기는 순(舜)의 사당에 참배했습니다. 순은 동이족 출신으로 알려졌습니다. 천불산은 그가 농사를 짓던 곳입니다.

  사당을 참배하고는 고대 제나라의 수도였던 임치로 이동했습니다. 제를 건국한 강태공 여상의 사당, 제환공을 춘추오패 가운데 최초의 패자로 만든 관중묘, 경공을 도와 제를 강국으로 만들었던 공자의 라이벌 안영묘를 찾았습니다. 

  그런데, 그 당시 그토력 위력이 대단했다던 환공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들판에 작은 언덕 하나가 있는데 그것이 환공묘라는 소문만 남았습니다. 더욱 씁쓸했던 것은 공자문소처(孔子聞韶處)였습니다. 

  이곳은 예(禮)와 악(樂)을 사상적 중심축으로 삼은 공자가 제의 음악인 소(韶)를 듣고 오랫동안 고기 맛을 몰랐다고 했던 곳입니다. 지금은 한적한 시골마을에 초라한 흔적으로 남았습니다만 그 옛날 공자 시절에는 이곳이 무척 번화했었을 겁니다. 

  그토록 중요한 역사적인 장소가 중국인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을 뒤로하며, 임치를 떠나 칭다오로 돌아왔습니다. 이제 벗들 중 셋은 귀국을 한다고 하니, 남은 셋이 산동 해안을 더듬기로 했습니다.  

역사칼럼니스트, 관인학사 강두 묵개 서상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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